언희당 백일장 장려상 "망년"

언희당
2022-08-31
조회수 429









가정의 달 맞이 제1회 언희당 백일장

에서 장려상 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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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년(忘年)





겨울비가 오려는 지 날이 우중충하니 잔뜩 흐리다. 쌀쌀한 바람이 한 줄기 지나간다.

옷깃을 여밀 정도의 찬바람은 아니고 정신이 좀 나도록 적당히 춥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바람인지 알 수 없지만 나를 빠뜨리지 않고 꼭 내 얼굴을 핥고 가주어서 좋다.

아침에 출근하여 대략 일을 봐두고 은행에 가는 길이다. 은행에서는 돈을 송금한 것이 아니라 돈을 인출해 간 것이라고 했다.

은행 직원은 내 신분을 확인하더니 CCTV에 찍힌 내용을 설명해 주면서 송금이 아니라 인출이라고 재차 얘기한다.

“착오는 우리가 아니라 고객님”이라는 말을 안했을 뿐, 그런 태도다. 어제 퇴근했더니 어머니가 좀 보자고 하셨다.

팔순을 넘긴 노모, 오전에는 구청에서 운영하는 수영장에, 오후에는 동사무소 별관에서 하는 미술 강습에 나가면서 나름 바쁘게, 자존심 하나로 사는 양반이다.



물리치료 용품을 사면서 급하게 빌린 50만원을 송금했는데 친구가 못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안 들어왔다는 것이여, 이것이 뭔 일인지 모르것다, 니가 좀 알아봐라”라고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내게 하명했었다.

그날 저녁 “분홍색 겉옷을 입은 노인 분이 돈을 인출해서 오른쪽 주머니에 넣는 모습이 CCTV에 찍혀 있다”한다고 은행 얘기를 전했더니, 어머니 팔을 내저으며 펄쩍 뛴다.

“아니 내가 돈을 찾았으면 그것을 모르겠냐? 그리고 그랬다면 주머니에 돈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그리고 내가 분홍색 옷이 없어. 다시 자세히 좀 알아봐봐”   

내가 다시 은행을 다녀온 이튿날 저녁, “분홍색, 황토색 비슷한 옷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가방은 바닥에 내려놓고… 

통장에도 인출로 찍혀 있다”고 한다면서 좀 더 구체적인 묘사와 정황을 전하자 어머니, 여기서 말문이 막힌다.

며칠 전 행색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면 돈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아무리 찾아도 없어”하시기에

“어머니 주장은 기억이고, 은행의 주장은 기록 아니요. 둘 중에 뭐가 틀릴 가능성이 더 크겠어요?

찬찬히 다시 기억을 좀 더듬어 보세요.”하였더니, 내 어머니 더는 펄쩍 뛰지 못하시고 쏟아져 나오는 한숨소리가 한참 길다.

본인이 CCTV를 직접 확인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인데, 경찰과 동행하여 은행에 가기는 싫은 모양이다. 여전히 50만원의 행방은 묘연하다.



내가 직장 때문에 고향인 K시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서울로 주말부부를 한 세월도 벌써 여러 해가 흘렀다.

집이 낡고 고칠 데도 많아 얼마 전에 마음먹고 도배장판을 새로 했다.

어머니 혼자 살 때는 그냥 두던 것을, 20여년 만에 처음 한 것이다.

누런 벽과 천정, 금이 가고 뜯겨나간 곳도 있는 바닥장판을 새로 깔았더니 냄새는 좀 나도 집안이 환하고 좋기는 했다.

그 과정에서 사나흘 집안이 난장판이 됐다. 어머니는 거실 유리창의 커튼도 떼어내 간수해 두었다.

보자기가 작아 한 짝은 보자기에 싸고, 한 짝은 쓰레기 비닐 봉투에 넣어뒀다고 한다.

그런데 쓰레기봉투에 넣어둔 커튼 한 짝이 사라진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이 쓰레기인줄 알고 내다 버렸을 것이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아이보리색 단색 커튼으로 낡은 것이다. 남은 커튼을 한 짝만 달기도 난감한 일이다.

커튼이 없어도 되는데 문제는 아파트가 남향이라 낮에 빛 때문에 텔레비전이 잘 안 보인다는 점이다.

나는 이참에 새로 사라고 그런 것이니 하나 장만하자고 했다. 어머니는 커튼 집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나는 지난 주말 크리스마스 연휴라 서울 집에 갔다가 사흘 만에 돌아와 보니,

나풀거리는 처마와 커튼 두 짝이 버젓이 걸려 있는 게 아닌가!

새것인가 하고 봤더니, 옛날 그것이다.

이것은 또 무슨 조화인가! 어머니가 한 짝만 남아있던 보자기의 커튼을 내다 버리려고 들고 나가다가,

다른 버릴 것이 또 있어서 보자기를 열어보니 커튼 두 짝이 온전히 그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커튼 두 짝은 보자기에 보관된 것이었고, 한 짝을 쓰레기 비닐봉지에 넣었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그것을 꺼내 빨았고, 나 없는 사이에 동생네가 와서 달아놓고 간 것이다.



기억이 하나씩 빠진다. 늙어서 이빨 빠지듯이 기억이 하나씩 빈다. 사라진 것은 커튼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내가 바둑을 둘 때 중간에 전화가 와서 분명 통화를 했는데, 뭐라고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다시 전화를 걸곤 하는데 그런 것과 비슷한 것일까?

술을 많이 마신 날 친구들과 여러 시간을 떠들었는데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

어제 대리운전하고 온 차가 어디에 있는지 헤매는 것,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은 다시 술을 마시면 무슨 얘기를 했고, 차가 어디에 있는지 솔솔 기억이 난다는 것이다.

나도 어제 점심을 뭐 먹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팔순에 50만원과 커튼의 일은 당연한 것이라고,

50만원으로 커튼을 새로 한 것으로 생각하고 말자고,

아침 밥상머리에서 나와 어머니는 그런 얘기를 하면서 웃었다.


“수영장 회원 한 사람이 머라고 한지 아냐? 나는 거그 테레비를 잘 보는디요, 거 있잖아요? 엎드려 절하는 데 있소 안?”

그것이 뭘까?

그것은 ‘불교방송’이었다. 팔순이 그런 나이다.

아침 출근길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불가역(不可易)’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일본과의 외교문서에 썼다는 불가역, 과거로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의 그 말,

그리고 관절염 앞에 붙는 ‘퇴행성(退行性)’ 같은 말들이 무슨 뜻이며 어디에 쓰이는지, 생각이 자꾸 그 방향으로 간다.

몸이 조금 더 좋았던 어제 혹은 그제,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던 방향 쪽으로는 못가고,

몸이 점점 더 나빠질 내일과 모레, 그러니까 죽음 쪽의 방향으로 밖에 못 간다는 뜻이 될 것이다.

웃고는 나왔지만, 퍼덕거리는 생선을 만진 것처럼 비릿하고 속이 아릿한 아침이다.

금년도 이렇게 저물고,

세월은 가뭄에 물이 마르는 것처럼 살아 있는 것들을 바짝바짝 말리면서 흘러간다.





/ 대진여자고등학교 이*은 학생의 아 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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